전기차가 집에 전기를 공급한다, 배터리를 가정용으로 쓰면 무엇이 달라질까
전기차는 충전소에서 전기를 받아 배터리에 저장하고 그 전기로 달립니다. 그런데 이 흐름을 반대로 돌리면 어떻게 될까요?
충전해놓은 자동차 배터리의 전기를 다시 집으로 보내 냉장고와 조명, 가전제품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최근 독일에서 이런 전기차 집 전기 공급을 현실적으로 확대할 수 있는 규칙이 마련됐습니다. 독일 에너지 규제기관은 10월 1일 전기차 배터리의 전력을 가정에서 사용하거나 전력망으로 다시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규정을 내놨습니다. Reuters
전기차가 단순한 이동수단을 넘어 커다란 이동식 에너지저장장치가 되는 것입니다.
전기차 배터리는 생각보다 크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소형 보조배터리와 전기차 배터리는 규모부터 다릅니다.
전기차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수십 kWh 이상의 대용량 배터리를 사용하는 차량이 많습니다.
차량이 주차돼 있는 동안 이 배터리의 일부를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다면 별도의 대형 가정용 배터리를 설치한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동차에 콘센트를 연결한다고 모든 집에 바로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동차와 충전기, 가정 전기설비가 양방향 전력전송을 지원해야 합니다.
V2L과 V2H는 무엇이 다를까
전기차 관련 기사에서 V2L, V2H, V2G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V2L은 Vehicle to Load입니다.
자동차 배터리로 캠핑용 전기제품이나 노트북 같은 외부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기능입니다.
V2H는 Vehicle to Home으로 자동차의 전력을 집에 공급합니다.
V2G는 Vehicle to Grid로 한 단계 더 나아가 자동차에 저장된 전력을 전력망으로 다시 보내는 개념입니다.
독일의 이번 변화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V2G입니다. 자동차가 전기를 소비하는 기기에서 전력망을 돕는 저장장치로 역할을 넓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Reuters
밤에 충전하고 낮에 사용할 수도 있다
전기요금이 시간대에 따라 달라지는 환경에서는 전기가 저렴할 때 자동차를 충전한 뒤 전력수요가 많고 가격이 비싼 시간에 자동차 전력을 집에서 사용하는 방식이 가능합니다.
태양광 발전이 많은 집이라면 낮에 남는 태양광 전기를 자동차에 저장했다가 해가 진 뒤 집에서 사용하는 방식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전기차가 태양광과 가정을 연결하는 저장장치 역할까지 하게 됩니다.
독일 규제기관의 결정도 자동차 배터리를 가정과 전력망에 연결하는 데 있던 규제 장벽을 낮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Reuters
정전이 되면 전기차로 집 전체를 사용할 수 있을까
기술적으로 가능한 시스템은 있습니다.
하지만 전기차에 외부전원 기능이 있다고 해서 정전 순간 자동으로 집 전체에 전기가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정전 시 가정의 전기설비를 외부 전력망과 안전하게 분리하고 자동차에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양방향 충전설비가 필요합니다.
차량 자체도 해당 기능을 지원해야 합니다.
따라서 ‘V2L이 있으니 정전 때 우리 집 전체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모든 전기차가 가능한 것도 아니다
전기차라고 배터리 전력을 외부로 보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 차량은 V2L까지만 지원하고 일부는 양방향 충전 자체를 지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동차가 기능을 지원하더라도 집에 설치된 충전기가 단방향이면 V2H나 V2G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전력회사와의 연결규정과 계량시스템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V2G가 실제로 확산되려면 자동차회사만 준비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충전기 업체와 전력회사, 정부의 제도가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배터리를 계속 꺼내 쓰면 수명이 줄지 않을까
가장 현실적인 질문입니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충전과 방전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성능이 감소합니다.
따라서 자동차 배터리를 V2G에 이용할 때는 배터리 수명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고려해야 합니다.
다만 배터리는 충전량과 온도, 충·방전 속도 등에 따라 열화 정도가 달라집니다.
무조건 한 번 전력을 집으로 보낼 때마다 배터리가 크게 손상된다고 단순하게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 서비스가 확산되면 제조사의 배터리 보증에서 V2G 사용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도 소비자가 확인해야 할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전력회사에는 왜 도움이 될까
전력 사용량은 하루 종일 일정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퇴근한 뒤 에어컨과 가전제품을 한꺼번에 사용하면 특정 시간대의 전력수요가 커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태양광 발전량이 많은 낮에는 전력이 많이 생산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전기차가 연결돼 있다면 전력이 남을 때 충전하고 부족할 때 일부를 다시 공급하는 방식으로 전력망의 부담을 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동차가 도로에 없는 시간보다 집이나 회사 주차장에 서 있는 시간이 훨씬 길다는 점도 이런 기술에 유리합니다.
전기차 구매 기준도 달라질 수 있다
지금까지 전기차를 고를 때는 주행거리와 충전속도, 가격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V2H와 V2G가 실제 생활에 널리 들어오면 ‘이 자동차는 집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가’도 구매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태양광 설비가 있는 단독주택이나 정전 대비가 중요한 지역에서는 가치가 커질 수 있습니다.
전기차 집 전기 공급은 자동차에 특별한 콘센트 하나를 추가하는 기술보다 훨씬 큰 변화입니다.
독일이 규제상 길을 열었다는 것은 전기차를 자동차이면서 동시에 에너지저장장치로 활용하는 시장이 본격적으로 시험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Reuters
다만 실제 이용을 위해서는 차량의 양방향 충전 지원, 전용 충전설비, 가정 전기설비, 전력회사 제도와 배터리 보증조건까지 함께 맞아야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전기차의 새로운 질문은 ‘한 번 충전하면 몇 km 가나’에서 ‘주차해 있는 동안 이 배터리를 어디까지 활용할 수 있나’로 하나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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